조현범은 본관이 옥천(순창)이고 자는 성회(聖晦)이며, 호는 삼효재(三效齋)로 건곡(虔谷) 조유(趙瑜)의 12세손이다. 그는 1716년(숙종 42)에 순천부 주암면에서 부친 동언(東彦)과 경주 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송년(松年)은 학문이 출중하여 일찍이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부친 동언 역시 학문에 뜻이 깊었다. 부친 동언은 특히 서적을 좋아하였는데, 집안에 있는 서책들은 모두 그가 직접 수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조현범은 일찍부터 유교의 도덕률인 충효 덕목의 충실한 신봉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부친의 유훈인 "남아가 천지간에 충효하는 것으로 가장 큰 것을 삼는다.(男兒天地 忠孝爲大)"를 생활신조로 삼았다. 그는 [구륙옹(九六翁)]에서 부친의 이 유훈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하였다.
현범(顯範)이 자서(自序)에서 말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남아(男兒)가 천지간에 충효하는 것으로 가장 큰 것을 삼는다."는 두 구(句)로 현범 형제에게 남겨주셨다. 그후에 현범이 그 유의(遺意)를 이어 여덟 구를 이루었다. 그 한 절은 다음과 같다. 하늘을 이고 땅을 밟아, 내가 처음으로 직분을 맡았네. 아버지 아니셨으면 어찌 태어났고, 임금 아니셨으면 어찌 살아갈꼬? 하늘과 땅 사이에서, 망극한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네. 오직 좋은 일은 정성을 다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 감히 그만두지 말고, 나라를 위하여 죽도록 힘쓰라. 다른 일에도 이렇게 한결같이 하면, 모든 일이 거의 다 이루어지리. 아버님의 교훈을 높이 받들어 영원히 집안의 교훈으로 삼으리. 불초한 제가 행여 이 뜻을 저버릴까 두려워, 울면서 이 글을 지으니 눈물이 가슴을 적십니다. 남아가 이 세상에 나서 자질이 갖추어졌으니, 충효를 머리로 삼아 귀한 이 두 가지를 오롯이 하네. 밝고 밝으신 아버님의 교훈을 능히 저버릴 수 없으니, 그러한 연후에야 이 말이 하늘에도 부끄럽지 않으리.
이 글은 자신의 신념을 부친의 유훈과 관련 지어 구체적으로 밝힌 내용이다. 그는 집안의 교훈인 충효를 중시하고, 이것을 실천하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이후의 삶은 이러한 가훈의 실천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로 볼 때 그는 유교의 도덕률에 충실한 전형적인 유학자였다.
이처럼 일찍부터 가학을 계승하고 실천한 그는 여러 차례 향시에 뽑혔다. 그후 경사에 출입하면서 경중사자(京中士子)들과의 교유를 통해 학문적 역량을 키워나갔다. 이 지역의 사대부로서 이처럼 학문적 기반을 갖춘 그는 순천의 문화와 역사를 기록으로 남길 생각을 했다. {강남악부}의 서문에는 그가 이 책을 쓰려고 10여 년을 준비하면서 여력을 구한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이 기간에 그는 {승평지}와 같은 이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기록한 책들을 구해서 읽었다. 그러한 준비과정을 거친 후 마침내 1784년(정조8) 그의 나이 69세 때 지역의 인물, 기사, 풍속, 지리 등 갖가지 사적을 모아 {강남악부}를 편찬하였다.
2) 저작동기
조현범은 {강남악부}의 저작동기를 서에서 "다만 작은 고을의 아름다운 말이나 착한 행위를 한 사람들이 잊혀지고 전해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한 까닭에 감히 이에 찬술하였다.(只懼十室之邑 或有嘉言善行之人 泯沒無傳 故敢此纂述)"고 밝혔다. 이렇게 보면 그의 저술목적은 이 지역의 훌륭한 사적을 후세에 전하려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또 다른 깊은 동기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정임중의 발(跋)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 물론 정임중의 발에서도, "강남 고을에 예로부터 사적 중 후세에 전할 것을 없어지지 않게 하고자 함이었다.(江南一府自古及今 人物事跡之可傳於後者 欲爲因此不泯之意也)"고 하여 위에서 인용한 저자와 같은 저작동기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아울러 저자의 선조인 건곡(유), 죽촌(숭문), 구천(철산)의 삼세충절에 대하여 언급한 뒤, "그런 까닭에 조군이 참고하여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는 곳곳의 선비들의 의론(義論)을 끌어내고 그 소식이 대궐에까지 알려져서 집에 표시하고 사당에 모셔지기까지 하는 은혜를 입었다. 서울의 선비들도 또한 그 정성에 감탄하고 그 의에 감복하여 충효가 장편시를 지어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였으니 어찌 옳은 일이 아니겠는가? 아아, 조군이 이미 여러 책에서 그 조상의 의와 절개를 모아 백세(百世)에 밝혀 드러내고자 하였으니, 조군이 이 책을 엮은 것이 또한 어찌 우연이겠는가?"라고 함으로써 저자가 품은 은밀한 저작동기를 드러내주고 있다.
앞에서 언급된 것처럼, 순창으로부터 순천 관내 부유에 이거한 조유가 곧 저자의 12세조였다. 그는 고려 말에 부정(종사품관)을 지낸 관인으로서 고려가 멸망하고 신왕조가 개창되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기관(棄官)하고 순창에 내려와 은거하였던 인물이다. 그후 1456년(세조 2) 병자화란 때 그의 둘째 아들 숭문과 손자 철산이 당시 육신(六臣)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부자가 함께 사절(死節)함으로써 일문삼세(一門三世)의 충절을 크게 떨친 가문이 되었다. 그리고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성삼문도 조철산과는 외종형제간이었다.
이와 같은 선조의 사적을 {창녕성씨보}, {풍양조씨보}, {해동충의록} 등의 책을 통하여 널리 수집하고 비로소 그 구체적인 사실들을 밝혀 그것을 후세에 높이 선양하여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로써 그가 {강남악부}를 저술한 또 다른 동기를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강남악부}의 저작동기는 좀더 분명해진 셈이다. 그 하나는 저자의 선조들에 대한 충의효절의 행적과 가문을 칭양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책의 인물소재 가운데 옥천 조문의 인사가 25명에 이르러 다른 집안 인물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도 입증된다. 다른 하나는 역시 서발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와 같이 향읍에 관한 고금의 충, 효, 열과 가언, 선행, 기사, 이적들을 후세에 남기려는 데 그 뜻이 있었다.
3) 강남악부 소개
{강남악부}는 알려진 바와 같이 순천의 산천과 역사, 풍속을 읊은 시집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순천악부}라 하지 않고 {강남악부}라 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까닭이 있다.
원래 강남이란 중국의 양자강 이남, 좁게는 그 상류의 강소성, 안휘성 남부와 절강성, 호남성 일대를 지칭하는 말이라 한다. 이 지역은 산수가 수려하고 물산이 풍부하였던 까닭에 낙토(樂土)로 인구에 회자되어왔고,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음풍농월이 이곳을 배경으로 하여 많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자연환경이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면 예로부터 '살기 좋은 땅'의 대명사로서 으레 '강남'이라 한 것 같다.
이 지역을 강남이라 칭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현재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전라도 순천지역의 재향사족간에 강남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조선 초기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그 같은 근거는 {강남악부}의 [부유행(富有行)]에서 찾을 수 있다. 조현범은 [부유행]에서 조유가 그 자손들을 거느리고 순창으로부터 순천 관내의 부유촌에 이거하여 자리잡은 후 그곳이 부내에서 제일가는 촌락이 되었음을 설명하면서 "따라서 그때 회자되던 노래에서 이 고을을 '소강남'이라 칭하였으니, 소강남이란 이름은 대개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故其時膾炙歌曲 府之稱以小江南者 蓋出於此云)"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순천을 강남이라 했을까? 이에 대하여 조현범은 [강남롱(江南弄)]에서 {동국여지승람}에 근거하여, "산천이 기이하고 아름다운 까닭에 그렇게 칭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순천의 "고을 지형이 바닷가 굽이에 치우쳐 있어 따로 한 구역을 이루고 있으며, 평상시 백성들의 물산이 부유하고 풍성한 까닭에 호사자들이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했다.
정임중은 {강남악부}의 발에서 "산천이 뛰어나게 아름답고 인물과 풍속이 번화한 까닭에 이름하여 소강남이라고 하였다.(山川奇麗人俗繁華故名之曰小江南者也)"고 했으며 민병승도 {강남악부}의 서에서 역시 "강남이라 한 것은 순천고을의 산천이 아름답고 풍속이 번화하여서 소강남이라 불리어왔기 때문이다.(江南云者順天之郡山川奇麗俗尙繁華故曰小江南也)"고 하였다. 이로 보면 순천을 밖으로는 자연환경이 아름답고 안으로는 인속(人俗)이 융성·화려한 까닭에 살기 좋은 고을이라는 의미에서 예로부터 강남 또는 소강남이라 칭한 것은 분명한 듯하다.
이로 볼 때 {강남악부}란 제명은 결국 순천의 악부란 뜻이다. 다만 저자는 순천의 별칭인 '강남'을 제목으로 했을 따름이다.
본래 악부는 중국 한대 무제 때 세워진 음악을 관장하는 관청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차차 이곳에서 관장한 음악을 수반한 문학 양식을 악부로 불렀다. 그후 악부는 많은 변천을 거치면서 음악적 요소가 탈락한 문학 작품으로 남아 악장, 가사, 혹은 노래를 모은 책의 의미로 전의되었고 악부시로 불리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중기부터 악부라는 명칭이 사용되어 고려시대에 악부의 형식이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주로 소악부란 명칭으로 사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 김종직의 {동도악부(東都樂府)}에서 비로소 악부로 쓰였다. 그후 심광세의 {해동악부}에서 악부 문학은 전환을 이룬다. 곧 김종직은 {동도악부}를 통해 민간설화의 문학화를 시도한 데 비해 심광세는 {해동악부}를 통해 영사시의 체계를 세운다. 그후 악부는 심광세의 {해동악부}의 영향으로 조선 후기에는 수많은 악부시집이 등장하면서 사서로서의 역할을 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악부를 사시집(史詩集)으로 지칭한 예가 많았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악부는 우리나라의 역사, 풍속, 민요에서 주제를 택한 것이 특징이었다.
조현범 역시 심광세의 {해동악부}의 영향을 받아 {강남악부}를 구상하였다. 다만 전자가 국가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면 후자는 순천의 지방사를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곧 고려에서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순천지역의 역사적 사실들을 시로 읊어 정리한 다음, 관련 인물들의 행적과 구체적인 사실들을 낱낱이 부주(附註)하였다.
2. 강남악부의 내용
{강남악부}는 편목상 153편의 악부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편목만 기재된 [사창속(社倉粟)], 시는 없이 부주만 실려 있는 [팔문장]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시 151편과 그에 관한 구체적인 사적들을 풀이하여 붙인 주 152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는 152개 항의 부주 내용을 분석하려고 한다.
수록 내용을 시대별로 보면, 고려시대의 것이 12개 항에 그친 반면 조선시대의 것이 140개 항(세조조 3, 성종조 2, 연산조 3, 중종조 2, 인종조 1, 명종조 11, 선조조 12, 인조조 20, 현종조 8, 숙종조 21, 영조조 57)으로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영조조의 57개 항 가운데는 정조 때에 관계된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숙종 때부터 정조 때까지의 내용이 모두 78개 항에 이르고 있어 전체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강남악부}야말로 조선 후기 순천지역의 야사집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전체의 내용을 크게 소재(人物과 地物)와 주제로 양분하여 분석한 다음 그 가운데 사료적 가치가 큰 것과 설화적 성격이 강한 것들을 뽑아 그 수치를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표는 시사 참고)
앞의 통계에 덧붙여 인물을 성별, 신분별, 씨족별로 살펴보자. 먼저 성별에서는 남자 119, 여자 19개 항으로 나타나 있다. 신분별로 보면 양반층 126, 중인층(서리) 2, 서민층 5, 천민층 5개 항으로 나누어진다. 씨족별로는 옥천 조씨 25, 경주 정씨 12, 양천 허씨 7, 목천 장씨 6, 제주 양씨 3, 양성 이씨 3, 연일 정씨 2, 고령 신씨 2, 기타 등으로 각각 나타나 있다. 씨족별 통계는 조선시대 순천지역 저성의 경향이 잘 드러나 있으며, 이 지역의 토성이었던 순천 박씨와 순천 김씨 등이 거의 보이지 않는 까닭은, 아마 조선 초기 이전에 중앙이나 그밖의 다른 지역으로 대부분 이주해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앞의 소재들을 주제에 따라 분류해보면 다음 표와 같다.(표는 시사 참고)
비고:주제에서 2중, 3중으로 관련된 것은 각 항에 그대로 포함시켰으며 주제가 불명료한 것은 유사한 항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위의 설화 외에도 설화적 성격을 띤 항목이 다수 있다.
앞에서 분석한 부주 152개 항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미 민병승의 서에서 "책의 이름은 악부지만 사실상 한 고을의 역사서요, 풍속지요, 유사고이다.(名爲樂府而實 一邑之惇史也 風俗誌也 遺事考也)"라고 하였듯이 역사 풍속 설화 전기 지리 등 갖가지 내용들을 집성한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내용의 일부를 몇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서 살필 항목은 크게 자연의 아름다움과 훌륭한 인물, 사회문제를 노래한 것 세 부분이다. 그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간략히 언급하기로 한다.
1) 자연의 아름다움
조현범은 첫번째 시 작품 [강남롱]을 통해 이 지역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자신이 왜 작품집의 제목을 {강남악부}라 했는지 간략히 암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경치와 누각, 시정 풍경, 물산, 인물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빼어난 경치의 호수와 바다 사이한
커다란 고을이 있으니 옛부터 아름다운 강남이라 했다네
화려한 누각에는신선의 말소리와 제비의 지저귐이 있고
주막이 줄줄이 문을 열어 싱싱한 물고기와 붉은 게가 어우러지니
해물의 맛이 달기도 하구나
물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곳무릇 집은 몇 채인가?
대나무 울타리가 즐비한데
복숭아꽃 어지럽게 떨어지고 수양버들 늘어졌네
앵무주 주변 십여 리에 아른아른 비 내리고
푸른 하늘 멀리 점점이 있는 섬은
반쯤 보이는 삼산 같구나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매개 노인 한 번 가서 돌아오지 않지만
그때 읊은 풍월이 오늘밤 얘깃거리인 것을
위의 시를 통해서 볼 때 경치 좋고, 물산이 풍부하며,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곳이 바로 순천이었다. 따라서 조현범은 중국의 강남처럼 아름다운 고장이라고 자부하여 이곳의 아름다움을 이와 같이 읊은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자부심은 [인제산(麟蹄山)]과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이곳의 역사와 자연을 함께 엮으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의도에 따른 작품은 [인제산] 외에도 [망해대(望海臺)]와 [여기암(女妓巖)], [혈천탄(血川歎)], [청대산(靑帶山)], [도암탄(盜岩歎)] 등이 있다.
2) 훌륭한 인물
속설에 "순천에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순천은 여러 면으로 매우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그러므로 속설의 인물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녀를 뜻한다기보다는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한 구체적인 근거가 바로 {강남악부}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강남악부}는 모두 153편의 악부시로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인물을 소개한 것이 138편으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훌륭한 인물이 많았던 지역이다.
{강남악부}에 실려 있는 인물을 분류하면 먼저 이곳 출신의 훌륭한 인물과 출신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살았거나 훌륭하게 다스린 인물들을 꼽을 수 있다. 앞에서 이미 전체적인 윤곽은 살폈고 여기에서 소개된 모든 인물들을 다 살펴볼 수는 없으므로, 그 가운데 몇 가지 사례에 한정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1) 충 절
조선시대의 통치이념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던 충절을 지킨 인물을 16개 항에 소개하고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는 저자 조현범의 일문이었던 조숭문과 철산의 사건을 노래한 [부자절(父子節)]일 것이다. 이들은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부자가 함께 화를 당했다.
부정(副正)의 아들이며 옥천(玉川)의 손자
부자가 충효문을 갖추었다네
충효가 서로 전하여 집안의 법도가 되었으니
몸이 있는데 어찌 군부(君父)의 은혜를 잊으랴
군부의 은혜가 이 삶에 중하니
칼날 앞에서인들 의를 굽힐손가?
병자(丙子)년 유월 초칠일
부자는 인(仁)을 이루고 성인의 말씀을 따랐구나
그대는 보지 못했나
성(成)씨 부자도 이와 같아서
두 집안의 절의가 한 계보로 전함을
이 시는 저자가 그의 12세조 조유의 충절을 노래한 [부정려(副正閭)]와 함께 충절의 가문이었음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에서 이루어진 작품이다.
{강남악부}에는 조문의 충절 외에도 이순신의 충절을 노래한 [이통제(李統制)],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는 데 힘쓴 정사준의 이야기 [주병사(主兵事)], 이기준의 이야기 [노량전(露梁戰)], 김대인의 이야기 [죽호인(竹弧引)], 장윤의 이야기 [장판서(張判書)], 정사횡의 이야기 [근왕충(勤王忠)], 허일의 이야기 [허웅천(許熊川)]과 정유재란 때 아녀자 강씨의 이야기 [강씨녀(姜氏女)]가 실려 있다. 또한 병자호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 조시일의 이야기 [창의행(倡義行)], 조원겸의 이야기 [통곡회(慟哭廻)], 김정두의 이야기 [경주후(慶州後)], 안용의 이야기 [안경력(安經歷)], 조시술의 이야기 [조진사(趙進士)], 정지채의 이야기 [벽동수(碧潼守)] 등이 실려 있다.
이처럼 {강남악부}에 실린 사례만 보더라도 예로부터 충절의 인물이 많이 난 고장임을 알 수 있다.
(2) 효 제
유학을 숭상했던 우리 조상들은 부모에 대한 효와 형제의 우애를 매우 중시했다. 그래서 부모를 위해서는 어떤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례 33개 항을 싣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를 들면 [진가효(陳家孝)]이다. 진한평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을 보였는데, 그의 다섯 아들 또한 부모에게 효로 순종하여 추운 겨울에도 산 물고기를 구해서 반찬을 마련해드렸다. 또한 진한평이 임질에 걸려 여러 해 고생했는데, 그의 넷째 아들이 양경을 빨아서 낫도록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행동에 감복한 이웃집의 어떤 사람도 효자가 되었다고 한다.
진(陳)생의 이름은 한평(漢平)이니
어머니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였네
몸에는 온전한 옷이 없어도
부엌에는 향기로운 쌀이 있네
조그마한 풀이 봄을 보답하려 하니
하늘이 상서로운 조짐을 내리셨구나
청빈이 한 집안에 있으니
효가 다섯 아들에게도 이어지는구나
힘써 부모를 모시고
산밭을 몸소 일구네
땔나무를 하고 때때로 낚시를 하려고
눈보라도 개의치 않고 가네
얼어붙은 내에서 잉어를 얻어 돌아와
그 맛난 음식으로 부모를 기쁘게 해드렸네
또 오래된 고질병을 빨아내니
아버지의 병이 이로부터 가벼워졌네
거기에 다시 상을 당하자
아침, 저녁으로 무덤을 쳐다보네
이웃까지 감화된 아들이 있으니
아아, 진씨네 집안은 효자의 이름으로 전하는구나
이외에도 공(功)이 있는 소를 팔지 않고 늙을 때까지 키우다가 병들어 죽자 묻어준 조태정의 이야기 [예우탄( 牛歎)]을 비롯하여 형제가 우애로 농사 짓고 살던 김덕관 형제의 이야기 [덕관행(德觀行)], 대장장이 김충길의 이야기 [야장탄(冶匠歎)], 조사문의 이야기 [형제호(兄弟好)], 정내의 이야기 [효자문], 허희인의 이야기 [효렴행(孝廉行)], 이전의 이야기 [일락최(一樂最)], 신언호의 이야기 [신공효(申公孝)], 이천수의 이야기 [천수효(千壽孝)], 양윤경의 이야기 [복호행(復戶行)], 유씨 부인의 이야기 [염본친(念本親)], 남도승의 이야기 [유구탄(乳狗歎)], 이중무의 이야기 [지성행(至性行)], 이생의 이야기 [쇄지문(碎指問)], 조경빈의 이야기 [조생한(曺生恨)], 통장인 김팔금의 이야기 [통공곡(桶工哭)], 아전 정덕중의 이야기 [뇌불문(雷不聞)], 조선갑의 이야기 [지행탄(至行歎)] 등 많은 작품이 실려 있다.
(3) 학 행
교육도시로 잘 알려진 이곳은 훌륭한 학행의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김종일 부사가 교학을 진흥한 이야기를 노래한 [흥학교(興學敎)]에서 보듯이 일찍부터 교육에 관심이 높았다. 또한 훌륭한 스승의 본을 보인 [명사행(明師行)]의 주인공 한백유 같은 훌륭한 인물도 있었다. 한백유 선생의 이야기는 스승과 제자 관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사일탄(事一歎)]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사례는 사도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이야기이다. 김형삼이란 선비와 양사재의 선생 한백유 사이에 있었던 일로, 큰 흉년을 만나자 학생들이 흩어져 돌아가고 먹을 것이 없던 때에 굶주리면서도 서로 저녁밥을 양보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또한 김형삼은 선생이 죽자 소상, 대상을 몸소 치름으로써 도리를 다했다.
아버지가 낳아주셨네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어찌 컸을까?
임금께서 먹여주셨네
임금이 아니었으면 어디에 의지할까?
스승이 가르쳐주셨네
스승이 아니었으면 무엇을 알까?
섬기기를 반드시 한 분같이 해야 하니
아버지와 임금, 스승은 모두 같으시네
옛날 난공자(欒共子:宋나라 蘇轍)도
떳떳한 상도(常道)를 저버리지 않았다네
창연히 공리(孔里:공자가 묻힌 곳)를 바라보며
일흔에 이처럼 슬퍼하누나
지금 와서 누가 인도(人道)를 폐할 수 있으랴
내가 김생을 위해 마음속으로 가만히 슬퍼하네
이외에도 학행의 본을 보인 인물은 수없이 많다. 이곳에 귀양왔다가 죽음에 이르러 부모에게 받은 신체발부를 더럽힐 수 없다면서 수염을 입에 물고 죽음에 임한 김굉필의 이야기 [선생수(先生鬚)]를 비롯하여 전염병에 걸려 죽은 친구를 몸소 염습하여 장례를 치러준 조태망의 이야기 [향로공(鄕老公)], 장자강의 이야기 [교수관(敎授官)], 정소의 이야기 [종산포(種蒜圃)], 정태구의 이야기 [존성묘(尊聖廟)], 임진상의 이야기 [염사당(廉士堂)], 허미의 이야기 [선사행(善士行)] 등도 학행의 본을 보인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학행의 본을 보인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관계가 계승되었기에 오늘날 교육도시로 자처할 수 있게 되었다.
(4) 청류와 의행
사람은 재물과 벼슬, 명예를 중시한다. 그러나 그런 일에 초연하면서 순리에 따라 살려고 했던 인물들도 수없이 많다. [가사편(佳士篇)]의 주인공 장승조는 이런 점에서 본받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집안이 가난했으나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려 했으며, 재물에 마음을 쓰지 않고 접대를 잘했다. 어느 날은 집안 어른이 빚 독촉을 받자 즉석에서 타고 오던 소를 줘서 빚을 갚도록 하고 자신은 걸어왔다. 이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기꺼이 도와주었기에 당시 사람들이 가사라 했다.
쌍암에 아름다운 선비가 있었으니
마음도 수양하고 행동 또한 아름다왔네
숙도(叔度)의 현명함이 없었더라면
어찌 어짊과 수치를 함께 실었으리오
높은 의(義)는 심상(尋常)한 데서 나오고
풍치(風峙)에는 구름이 이네
타고 있던 소를 주고 돌아오니
친척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여기에서 보네
뿔을 팔아 관가의 빚을 갚으니
온화한 기운이 온 집안에 있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지만
누항(陋巷)에 치우쳐 있어 이치가 어그러지는구나
불행히 이미 죽은 지 오래되었으니
아아, 다시 무엇을 기다리리오
이외에도 현달한 관리가 되어서도 청렴하고 소박한 생활을 했던 주열의 이야기 [한사탄(寒士歎)]을 비롯하여 가난한 친구의 병을 구하기 위해 재물을 아끼지 않은 허찬일의 이야기 [군자인(君子引)], 수백 냥이 넘는 준마(駿馬)를 돌아갈 길이 급한 병조판서에게 그냥 주었고, 흉년에 친구의 아들이 경서를 팔려고 하자 샀다가 돌려주는 등의 선행을 일삼던 유필무의 이야기 [준마증(駿馬贈)], 이화승의 이야기 [구화은(救火恩)], 정기중의 이야기 [반중염(盤中 )] 등도 훌륭한 선비들의 이야기이다.
(5) 명환과 양리
이 지역을 다스리러온 관리들 가운데 훌륭한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법도를 바르게 세우기도 했고, 백성들의 생활향상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으며, 교육진흥을 위해 일하기도 했다. 그런데 모든 인물들을 다 소개할 수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팔마비'의 고사와 관련된 최석의 이야기와 교학진흥을 임무로 삼았던 부사 김종일의 이야기 [흥학교]를 살펴보기로 한다.
지금 여기 사람들은 팔마란 말을 좋아한다. 이곳에 팔마란 명칭이 생겨난 것은 최석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예로부터 태수가 바뀌어 갈 때면 반드시 말 여덟 필을 선물했다. 이곳 태수 최석이 비서랑이 되어 돌아가게 되자 고을 사람들이 관례에 따라 말 여덟 필을 주었더니, 그가 서울에 돌아가서는 그 말을 돌려주었다. 그 가운데 새끼를 밴 말이 망아지를 낳자 망아지까지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이로써 말을 바치는 폐습을 사라지게 했다. 이처럼 훌륭한 태수의 사적을 저자는 [팔마인(八馬引)]으로 노래했다.
그대는 말을 아끼나 나는 맑은 마음을 아끼니
어찌 좋은 말을 골라 타고 서울에 가야겠소
서울에 갈 수 있는 말이면 좋은 말이라오
집에 돌아가 말을 돌려보낸 것이 내 본 마음이라오
고을 사람이 받지 않았으나 나는 웃어 넘기었으니
말이 낳은 망아지도 순평 고을 것이라오
한 마리 망아지를 데려왔다가 내가 더럽혀질까 두려웠으니
서른 둘 말굽이란 부질없는 것이라오
누가 아름다운 자취를 본받고자 세 글자를 적어넣었던가
최군의 이름을 천년 동안 남기려 한 것이라오
부사 김종일은 순천에 와서 교학의 진흥을 자기 임무로 여겼다. 그래서 진사 조시일을 향교의 도훈장으로 삼은 뒤 학생의 상벌을 분명히 하자 교화가 크게 행하여졌다. 이로부터 순천은 교육의 기틀을 잡았고, 흥학비를 세우는 등 교학의 전통이 이어졌다. 이처럼 교육을 위해 애쓴 김종일의 이야기를 저자는 [흥학교]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태수가 오셔서 학문을 귀히 하시니
사람을 가르치매 윤리가 있고 마을에는 학교가 생겼네
문옹(文翁)이 조주(潮州)를 교화하니
위에서는 아름다운 행위가 있고 아래서는 따른다네
성인의 도를 옹위하여 집집마다 깨우치니
많은 책을 모으고 사람마다 배우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흥학비(興學碑)가 반궁(泮宮) 밖에 높이 솟아 있는 것을
또한 황후(黃侯)가 계시니
능히 후생들로 하여금 미몽(迷夢)에서 깨어나게 하겠네
이외에도 관가에 저장된 곡식이 떨어지기까지 백성에게 곡식을 나눠주고 월봉으로 소 32마리를 사서 각 면에 주어 농사를 짓도록 힘쓰는 등 백성을 지극히 사랑한 부사 강필리의 이야기 [사팔우], 통판 장일의 이야기 [통판정(通判政)], 선정을 베푼 이정의 이야기 [구암탄], 백성들의 봉납의 고통을 없애려고 밤나무를 모두 베어버린 이봉징 부사의 이야기 [율촌요(栗村謠)], 법도와 기강을 바로 세운 남구명의 이야기 [모추환(暮秋還)], 백성들의 호조를 감해주고 영세한 가구에 은혜를 베푼 부사 이겸환의 이야기 [손호조(損戶租)] 등은 이곳을 다스린 훌륭한 관리들의 이야기이다.
3) 사회문제
조선 후기에 이르면 사회적으로 신분질서의 붕괴 등으로 인해 계층간의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고, 관리들의 나태로 법도가 무너지기도 했다. 또한 공납의 과중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기도 했고, 왕권의 무능으로 군기가 문란한 틈을 타서 도적떼가 횡행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일어난 각종 사회문제를 {강남악부}에서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반상간의 신분적 갈등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이야기는 박동도의 이야기인 [존심당(存心堂)]에서 찾을 수 있다. 박동도는 운곡에 살았는데, 백성들이 예법을 지키지 않자 그 가운데 한 명을 붙잡아 볼기를 쳤더니 어느 날 밤 그 사람이 박동도의 집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관기와 그를 비호하는 관리와 유림 간의 쟁단이 감영에까지 제소된 사례를 [존성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관기 진루월이 외람되게 관청의 큰 말을 세내어 타고 관가의 행차를 뒤따라 가자 정태구가 그녀를 잡아들여 죄를 따진 후 곤장 7, 8대를 때렸더니 부사가 정태구를 잡아 가두고 양전도유사의 직책을 바꾼 일이 있었다. 그후 향교에서 회의를 열어 진루월에게 곤장 8대를 때렸는데, 그녀가 구관을 통해 치욕을 씻으려 해서 문제가 된 사건을 다루고 있다.
또한 관리들이 살인사건을 잘 처리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었던 이야기 [열부도(烈婦刀)]가 있다. 이양택이 향시를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광청진에서 물이 불어 그 마을 사내에게 물을 건널 수 있도록 청하였다가 죽음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의 부인 허씨가 시동생과 함께 관가에 가서 원수를 찾아줄 것을 부탁했으나 해결되지 않자 전주 감영까지 가서 호소했으나 해결되지 않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일은 후일 임금이 나서서 해결하였는데, 이로 보면 당시 관리들의 안이한 일처리를 볼 수 있다.
공납이 과중해서 귤나무를 베어버린 사건을 노래한 것이 [작귤행(斫橘行)]이다. 원래 순천의 토산물인 유자가 집집마다 있었는데, 유자가 있는 집들은 심한 토색질을 당했다. 이로 인해 고통을 당한 집들은 나무를 베어버린 경우가 많았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율촌요]에서도 나타나 있다. 이 노래를 통해서 저자는 백성을 기쁘게 하는 관리들의 선정을 기대하였다.
뜰 앞에 아무도 귤나무를 심지 않는구나
귤나무가 많으면 귤도 많고
귤이 많으면 색출도 많으니
색출이 많아지면 귤은 어디서 나나
귤이 있으면 고통스럽고
귤이 없으면 편안하다네
귤나무를 베고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으니
공물을 바치고도 사랑받지 못했다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연산(連山)의 젖구멍이 다시 솟아나는 것을
위에서 밝히 다스리면 아래 백성이 기뻐한다오
그런가 하면 군기의 문란으로 기강이 무너지자 대낮에 촌락을 횡행하며 일대를 위협한 도적떼의 난무상이 나타났으니 이를 노래한 것이 [포적행(捕賊行)]이다. 이 노래는 장성한이란 인물이 도적의 무리가 가득했던 주암, 쌍암면을 토적한 일을 노래한 것이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박성두란 도적이 대낮에도 말을 타고 마을을 쓸고 다니면서 재산을 빼앗고 계곡에서 술모임을 열어도 잡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성한이 지혜로써 그들을 모두 평정시킨 이야기이다. 이 사례를 보면 당시 포졸들이 도적의 토색질에 전혀 무방비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오히려 일반 백성이었던 장성한이 토적(討賊)을 할 정도로 군기강이 무너져 있던 당대의 사회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핀 사실 외에도 {강남악부}는 수많은 문화와 역사적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예를 들어 서민이 첩을 얻었을 경우에 본처를 '대모'라 칭하고 그 첩을 '소처'라 불렀는데, 이억선이란 한 상민이 세 명의 처를 거느리면서 대모와 소처 간의 질서를 엄준히 하였다는 [억선처(億善妻)], 장례풍속과 관련된 초분(草墳) 이야기 [호초빈], [통공곡] 또한 사회풍속사 연구에 특이한 사료가 될 것이다. 이밖에도 [용왕댁(龍王宅)]과 같은 흥미로운 설화와 전설들도 실려 있어서 구비문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이로 볼 때 {강남악부}는 이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가치를 지닌 자료라고 할 수 있다.